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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겨울아, 고마워 /최영철

 


간절히 기다려준 사람에게 더 빨리 더 크게 봄은 그렇게 온다

 



 

 
우수 지나 경칩이 며칠 앞이다. 겨울의 얼어붙은 물상이 풀리는 시점이다. 날이 포근해지고, 양지 바른 곳에서는 새싹이 움트고, 농부가 새해 농사를 준비하는 시점이다. 나 역시 지난해부터 개간을 시작한 산밭에 나가보았다. 혼자서 겨울을 넘긴 가녀린 묘목들이 오랜만에 온 나를 보고 방긋 웃고 있었다. 돌보는 이 없어도 모두 조금씩 몸이 단단해졌다. 바르르 몸을 흔들며 지난 겨울의 긴긴 외로움을 하소연하는 듯도 하다. 이즈음의 풍경을 나는 어느 시에서 '입춘과 경칩 사이 턱을 괴고 앉아/우수(憂愁)에 젖는 우수(雨水)'라고 쓴 적이 있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기법이지만 근심 걱정을 일컫는 우수와 날이 풀리는 우수가 영 다른 자리에 있는 것 같지 않다. 활동력이 떨어지는 결빙의 겨울은 갖은 잡념으로 근심걱정이 많은 계절이고, 우수는 그것들을 녹여 빗물로 내리게 하는 해빙의 시점이니 일정한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 우수는 그러니까 얼어붙은 대자연이 풀리듯 우리 마음속의 응어리도 풀어야 하는 시점이다.

돌아보면 지난 겨울의 응어리가 너무 크고 깊었다. 다른 이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선 나부터 그랬다. 내가 찍은 후보가 너무 적은 지지를 받은 데 대해 나는 한동안 토라져 있었다. 집권당이 된 그들의 말꼬리를 잡고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무슨 트집 잡을 건더기가 없나 신문 이곳저곳을 살피기도 했다. 9시 뉴스가 그만 보기 싫어졌고 투표 같은 건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너무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야속해 겨울 내내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

모두 내 탓이었다. 신념과 확신 없이 어렴풋한 기대만으로 찍은 한 표였다. 그가 당선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라며 자포자기하고 찍은 한 표였다. 숭례문이 국보 1호였고, 현판 글씨가 그렇게 명필이었다는 것도 확실히 모르고 있었던 나의 잘못이었다. 맹렬했던 추위도, 전기까지 끊긴 냉방에서 혼자 죽어간 그 어르신의 불행도, 내 탓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던 내 탓이었다. 나는 나 하나를 데우는 데 급급했다. 나의 정치적 희망은 너무 비현실적이었고, 이웃을 생각하는 나의 가치는 너무 낭만적이었다. 머리를 다친 후 서늘해진 몸을 핑계로 나는 너무 따스한 아랫목만을 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게으름을 추운 겨울 탓으로만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여기까지 무사히 봄을 실어 날랐다.

다시 봄의 맥박이 뛴다. 땅 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생명들이 너도 나도 재깍재깍 똑딱똑딱 숨쉬기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봄이 해낸 일이 아니다. 부지런히 봄을 준비한 겨울이 해낸 일이다. 가을까지의 기나긴 과업을 수행하느라 힘이 다 빠진 배터리를 겨울은 제 혼자 힘으로 충전해냈다. 나는, 우리는, 춥고 시리고 힘들기만 하다고 문이란 문은 다 닫아걸고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 외롭고 긴 과업을 말없이 수행해준 겨울이 고맙다.

봄은 어김없이 오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무게로 오는 것은 아니다. 간절히 봄을 기다려준 사람에게 더 빨리 크게 다가온다. 몇 끼를 굶은 사람 앞에 놓인 음식과 삼시 세 끼를 다 챙겨 먹은 사람 앞에 놓인 음식이 같을 수는 없다. 초라한 밥상도 진수성찬이 될 수 있고 산해진미도 신 김치 한 조각보다 못할 수 있다. 포만감과 음식의 맛은 반비례한다. 봄을 감지하는 능력 또한 그렇지 않을까. 따뜻하고 배부른 겨울을 났던 사람에게 봄은 민숭민숭하겠지만 시리고 주린 겨울을 났던 사람에게 봄은 더없이 포근하고 화사할 것이다.

늘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이에게 무슨 큰 성취의 기쁨이 있을 것이며, 가슴이 미어지는 이별을 겪어보지 않은 이에게 무슨 큰 만남의 기쁨이 있겠는가. 실내 온도를 양껏 올려놓고 반팔로 겨울을 났던 이에게 봄의 체감기온은 오히려 으스스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겨울의 그 혹독한 상실과 결여가 고맙다.

그렇게 겨울을 넘기고 봄을 맞는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살을 에는 칼바람보다 더 힘들었을 외로움과 씨름한 우리 집 홀아비들-말티즈와 금화조와 십자매, 벗은 나무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웠을 윗동네 휠체어 노인, 얼어붙은 난전을 지켰던 할머니들, 텅 빈 골목에 서서 한참 손님을 부르다 간 트럭 행상, 모두 잠든 신새벽에 악취 나는 어제의 잉여물들을 걷어간 청소차, 그들이 있어 또 어김없이 봄은 왔다.

시인
  입력: 2008.02.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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