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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전업시인과 휴가

 

 

최영철

 

 

내 생애 최고 행복했던 휴가는 뇌수술 받아 입원한 때였다


 

 
찜통더위가 시작되었고 때는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속 모르는 한 친구는 그렇게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중국 여행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신통찮은 건강을 핑계로 웃어넘겼지만 전업시인이 당면한 처지를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하긴 이 서글픔의 근원이 어느 누구의 탓은 아닐 것이다. 누가 하라고 시킨 일도 아니고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일도 아니니 지금 당장 그만두고 다른 밥벌이를 찾아 나선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이 일이 좋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면 일정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시 쓰는 일은 다른 일에 비해 경제적 교환가치가 턱없이 적고 사회적 대우 또한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다. 누구에게 고용된 처지가 아니니 나의 처우를 하소연할 곳도 없다. 헛된 이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조직 생활이 힘들어진 사회 부적격자로 오인 받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스스로 시인입네 떳떳하게 밝히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이다.

전업시인은 좀 그럴듯한 말로 하면 1인 기업이다. 자신이 사용자고 자신이 노동자인 셈이다. 좀 우아하게 표현하자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사용자일 것이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운용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노사가 따로 없다. 둘이 아닌 하나다. 그래서 그의 일과는 조금도 쉴 틈이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뜨는지, 달은 뜨는지, 별 탈 없이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는지, 이웃은 모두 무사한지, 동네 개와 방랑자 고양이는 끼니를 거르지 않았는지, 외롭지는 않은지 걱정해야 한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정세와 국내 정치판에 분개하기도 하고 텔레비전 다큐 프로를 보다가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그러다 가슴이 뜨겁고 서러워져 술로 시름을 달랜다. 그 힘든 일과는 잠자리까지 이어져 꿈에서도 그는 줄곧 깨어 있어야 한다. 여차하면 일어나 머리맡에 둔 백지 위에 무언가를 기록해야 한다. 스물네 시간 쉴 틈이 없는 노동이다.

이처럼 전업시인에게는 휴가도 휴일도 없다. 이 무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났다 해도 피서지에서 그는 조금 전 열거한 과업들을 출장근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격무에 대해 인접 장르의 예술인들까지 영 엉뚱한 시각을 갖고 있는 경우를 보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우수한 작품을 쓰고 있는 시인 작가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는 1000만 원 안팎의 창작지원금이 너무 과도하다는 이의를 다른 분도 아니고 인접 예술에 종사하는 분들이 제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데 그런 큰 지원금을 줄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이다.

전업시인의 서러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피를 말리는 정신적 노동에 대한 가치를 가족 친지들은 물론 예술가들마저 몰라준다는 것, 긴장을 놓고 팔다리 뻗고 마음 편히 쉴 틈도 없이 종사하는 시의 과업을 동업자들조차 몰라준다는 것이 서러운 것이다. 어떤 분은 같은 집에 하숙하던 한 작가 지망생 친구가 늘 빈둥거리며 책만 읽고 있어 그게 편해 보여 자신도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우스갯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직종이 다 그럴 것이지만 당해보지 않으면 그 일의 고락을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오십몇 년 내 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여 년 전 머리를 다쳐 신경외과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였다. 한나절의 뇌수술을 받고 며칠 만에 깨어난 나는 무엇이 좋은지 계속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고 했다. 거기에다 식욕까지 당겨 보름 만에 몸무게가 십 킬로그램이나 불었다고 했다. 뇌수술 후유증을 염려해 병원에서 모르핀 성분을 투여했기 때문이었는데 아내는 그런 내가 이제 그만 바보가 되어버린 줄 알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 생애 최고의 행복했던 순간이자 생애 최고의 휴가였다. 쉴 새 없이 나를 얽매던 자의식으로부터 잠시 놓여난 시간이었으니까.

전업 예술가들에게 휴가는 없다. 휴가비는 고사하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만사 다 잊고 어디 풍광 좋고 시원한 데 가서 쉬었다 오라는 배려를 베푸는 이도 없다. 사용자 없는 종신 고용자,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지만 사표를 제출할 곳도 그런 만용을 다독이고 만류해줄 상사도 없다. 단체교섭을 벌일 노조도, 편들어줄 후원 조직도 없다. 각종 과민성 신경증을 동반하는 직업병이 있으나 아무도 그것을 산재 처리해 주지 않는다. 이제 그만 편안히 쉬시라고 공로패와 퇴직연금을 지급해 주지도 않는다. 그런 그들에 비해 여러분의 여름은 그 얼마나 행복한가.

시인
  입력: 2008.07.18 20:26 / 수정: 2008.07.19 오전 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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