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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그래도 서해가 희망이다 /최영철


태안의 기름은 무분별 성장한 지난 세기의 토악질이다

 
지척에 두고 있는 동쪽 바다가 들으면 토라질 일이겠으나 나는 동해보다 서해가 좋다. 동해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전진하는 남성의 기상이라면 서해는 쓰다듬고 물러서는 여성의 품성을 지녔다. 동해가 남성성의 우렁찬 구령이라면 서해는 여성성의 잔잔한 속삭임에 가깝다. 동녘의 산과 강이 높고 깊다면 서녘의 산과 강은 낮고 얕아 보인다.

그러한 외양만 두고 본다면 동녘은 웅대한 전진의 표상이고 서녘은 더딘 침잠의 모습이지만 속살을 들추어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밖으로 드러난 동해의 역동적인 모습 저변은 심한 흉터와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물은 탁하고 공기는 매캐하다. 서해가 희망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훼손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열었던 중요한 화두는 기술문명이 지녔던 개발지향을 반성하는 생태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서해란 말인가. 지난 겨울 태안 앞바다에 쏟아진 엄청난 양의 기름띠를 뉴스 화면으로 보면서 나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었다. 오랫동안 진행된 개발의 주역은 동해였지 서해가 아니었다. 급물살을 탄 산업화로 성장의 혜택을 누린 지역은 영남을 축으로 하는 반도의 동쪽이었다. 반도의 서쪽은 그동안 상대적 박탈과 낙후를 면치 못한 지역이었다. 기름유출 사건이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가해진 하나의 경고였다면 그것은 동쪽을 향한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 탓이었을까. 태안으로 가기 위해 건넌 서해대교의 위용이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길은 시원하게 잘 닦여 있었으나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었던 행담도 휴게소는 휘몰아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을씨년스러웠다. 급물살을 타고 있는 서해안 개발도 그렇지만 어지럽게 쭉쭉 뻗은 길들이 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어디일까를 생각하며 나는 잠시 몸서리를 쳤다.

무작정 태안 읍내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바다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된단 말인가. 그 시린 겨울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분주할 즈음, 온전치 못한 건강을 핑계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내가 아닌가.

태안읍 곳곳에는 기름 유출과 관련한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내용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또 하나는 자청해서 먼 길을 달려와 기름때를 닦아 준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감사였다.

그것은 또 정확하게 양분되는 우리 사회의 절망과 희망이기도 했다.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하느라 늦게 사고 현장에 왔으나 생면부지의 이웃들은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와 같이 팔을 걷어붙였다. 우리가 아직 절망할 수 없는 것은 아픔을 나누어 가질 줄 아는 이런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눈보라 속에 기름 범벅이 되어 서해를 닦아 주고 간 그 사람들에 비해 나는 너무 늦게 여기에 왔다. 그것이 참으로 미안했다.

갯벌은 온통 검은빛이었다. 막다른 방파제에 멈추어선 트럭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가 찌렁찌렁 적막을 흔들었다. 트럭 주인은 그 소리로 갯벌의 생명들을 깨워 보려고 했던 것일까. 갯벌은 너무 넓고 끝이 없어서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뉴스에서는 갈매기들이 돌아오고 쏙과 게와 고동이 느리게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작정 걸어 당도한 이 작은 포구의 갯벌에는 배 서너 척이 기진맥진해 엎드려 있을 뿐 그 어떤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필사적인 힘으로 발버둥 치다가 신음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죽어간 생명들 앞에 나는 고개 숙여 조문했다. 자신들의 일터요 집이었던 갯벌은 그렇게 거대한 무덤이 되어 있었다.

서해안에 유출된 기름은 무분별한 성장을 계속한 지난 세기가 퍼질러 놓은 토악질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꾸역꾸역 너무 많은 것들을 집어삼켰고 그 불편해진 속을 감당하지 못해 뒤뚱대다가 엉뚱한 곳에 가서 검은 화농을 토해 놓았다. 사람들의 기대처럼 그 상처가 쉽게 아물 것 같지는 않다. 아니 금방 아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아픈 바다를 바라보며 좀 더 아파해야 할 것이고 바다는 좀 더 큰 소리로 우리를 원망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앓는 소리가 내가 사는 동녘은 물론 이 땅 구석구석을 아프게 깨우쳐 주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 아주 오랜 참회록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둔감해진 우리의 죄의식을 혹독하게 깨우쳐 줄 것이란 점에서 서해는 또다시 우리의 희망이다. 시인
  입력: 2008.04.0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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